김경협, 부천노동운동의 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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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난꾸러기같은 미소를 가진 김경협 감사


김경협 감사(현, 한국산업인력공단 감사)는 화려한 이력보다 그 순수함이 떠오르는 인물이다. 작지만 강단있는 체구에서부터 현대사의 역경을 걸어왔다는 느낌이 전달된다.

8,90년대 한국 노동운동사에서 잘 알려진 김경협 감사는 ‘부천노동운동계’의 신화적 인물이다. 1989년 부천지역금속노동조합 사무국장을 시작으로 부천노동계와 인연이 본격화되었다. 한국노총부천지부 기획실장으로 옮기고, 부천노총 의장을 3선하면서 부천노동계의 ‘대부’역할을 수행했다.

그후, 김감사는 청와대 사회조정비서관을 거쳐서 지금의 한국산업인력공단의 감사직으로 옮긴 것이다. 부천지역에서 정치적 꿈을 펼칠 준비를 하고 있다.

” 부천에서 오랫동안 살아왔다. 노부모님도 모시고 살고 있어 부천이 제2의 고향이다. 살아오면서 만나왔던 분들과 계속 인연이 이어지는 것이고, 뭐 특별하게 의미를 두고 있지는 않다. 가까운 분들하고 산에도 가고, 좋아하는 낚시도 가고. 아직은 그렇다”는 조금 건조한 대답이지만, 군더더기 없는 그의 생활 방식을 보여주는 것 같다. 사실, 지난 17대 총선부터 김경협의 부천 출마설은 무성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만큼 부천노동계의 김경협의 팬클럽이 많다는 것이다. 노동자의 파워가 큰 지역인 만큼 그에 대한 기대도 크지 않을수 없을 것이다.

김경협 감사는 전남 장흥 출신이다.
전남장층초-장층중-국립부산기계공고-성균관대 사회학과(82학번)의 경력 사항을 보면, 그의 인생이 그다지 순탄하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되었다.

장흥 시골 마을, 가난한 농부의 6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고 한다. 미래에 대한 꿈보다 가난을 먼저 배운 것이다. 그래도 어릴 적 꿈은 언론기자였다고 한다. 사회 곳곳을 누비면서 매일 새로운 기사를 쓰는 일을 하고 싶었다는 것. 그런 꿈은 현실 속에서 무너지기 시작했다. 장남이라는 자리, 지병으로 누워계신 아버지 등 집안을 챙겨야 하는 입장에서 자신의 꿈보다는 가족의 생활이 더 시급한 것이었다.

그는 어려운 환경으로 당시 교장선생님의 추천으로 국립부산기계공고를 입학하게 되었다. 3년간 전액 국비 지원이 된다는 것과 빨리 사회에 나가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이 앞섰기 때문이다. 그는 3학년 실습에 대한 기억을 떠올렸다.

“정밀가공기능사(선반)자격증을 취득하고 3학년때 실습을 나갔다. 열악한 작업환경, 비인간적인 대우, 장시간 근무 끝에 받은 월급은 겨우 몇 푼, 근로자가 되어 소작농만큼이나 가난하게 살아야 하는 미래를 생각하니 눈 앞이 깜깜했다”

그래서, 서울로 상경해 성균관대 사회학과에 입학했다. 그렇지만 암울한 80년대 사회 속에서 젊은 사회학도에게는 캠퍼스의 낭만을 즐길만한 여력이 없었다. 군부독재 투쟁 등 학생운동을 하면서 제적을 당하고 2년간의 옥고를 치르는 과정을 겪어야 했다. 사회변혁의 열정은 “현장투신”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김감사는 선반자격증 덕분에 남들보다 현장 적응이 빠르고 노동자와 쉽게 어울릴 수 있었다고 말한다.

87년 노동자대투쟁, 그리고 90년대 민주화 이후 노동계를 떠나 새로운 길을 떠난 당시의 많은 동지들보다 그의 외도는 조금 늦은 편이다. 오히려, 부천지역 노동운동의 전환과 활성화를 위해 스스럼없이 자신의 자리를 내준 것이 옳다.

그는 최근, 지역자치와 복지분야에 대한 공부로 바쁘다. 새로운 김경협의 역할을 찾기 위해 분주한 노력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제 노동운동의 경험을 시민과 함께 하는 생활운동에 투자하고 싶어 한다.

“김경협, 부천노동운동의 대부”의 6개의 생각

  1. 바쁘긴 개코가 바빠…하도 바빠서 이과수 폭포보러 나갈 시간은 있고. 하긴, 쪽팔린건 아는 모양이던데…공항에 기어들어올때 썬그라스로 위장하고 거칠게 기자양반 밀어부치더군. 똥 누러갈때와 똥 누고나와서 표정다른건 언놈이나 다 똑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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